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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부정공>전부정건곡공정려비음기(前副正虔谷公旌閭碑陰記)
前副正虔谷公旌閭碑陰記 余嘗讀冶隱吉先生傅曰麗氏之末通喪之制不行士大夫喪其親者皆百日即吉惟先生及圃隱鄭先生廬墓喪三年而當時士友亦有行之者竊以爲孝與忠一玖爲孝而能行人之所不能行則其爲忠必能爲人之所不能爲二先生所立之卓爾蓋自有所本焉獨恨夫士友之失其名不得與之並傳也及後得徵士金君所著虔谷趙公墓表而讀之盛稱其忠孝大節當時知德之士己與冶隱同稱而其生也又與二先生同時向所謂士友者豈非公歟公諱瑜淳昌人有至行初喪母能致哀謹禮居後母憂亦如之父歿躬負士營葬盖前後皆服三年而日省于墓甚風雨不廢也始以進士及第仕 麗朝至副正麗亡國朝累以官徵之至檢校漢城尹皆不就 世宗嘉之表其閭曰孝子前副正趙瑜之門其書麗朝官者示不臣用成公志也嗚呼以食稻衣錦之不能安而寧背一世之所行以循其心推是心以食周粟爲恥而又背一世之所趨以行其志雖伯夷之行不過求其心之所安而得之而巳若公可謂信道獨行之君子歟公始居淳昌之虔谷後徒順天之謙川以終 肅宗時湖南人士慕公之德立祠以爼豆之舊有旌閭之碑世遠石幣幾不能支子孫謀所以新之者使宗人夢臣走京師屬不佞記其陰不佞曰昔孔子題延陵季子之墓八言巳耳自孔子至今累千歲無敢以一字加焉者然季子之賢昭於天下猶日星焉今使擧世之人人操筆書公之賢豈有加於 聖祖之所命者乎既言其孝矣亦著其忠矣九言之褒重於九鼎而小子曷敢贊焉夢臣曰雖然宗人之願也於是謹摭遺事爲若干言俾歸而刻焉公有二子參議斯文節度使崇文參議子智山能世其家與弟三人相友愛有江淮大衾之風焉節度與其子哲山父子俱與六臣事及於禍余故附書碑末以見公之忠孝不獨善其身而又以成敎於家者如此余之書此不獨爲其子孫榮而將以爲邦國之光云 宜寧 南有容 撰 大提學雷淵 전부정건곡공정려비음기(前副正虔谷公旌閭碑陰記) 내가 일찌기 야은 선생의 전기를 읽어보니 거기에. 『고려 말에는 상례(喪禮)가 지켜지지 않아 사대부들도 부모상을 당하면 모두 一백일만에 복을 벗었다. 그러나 오직 선생과 포은 정몽주 선생만이 여묘살이 三년을 마쳤는데, 당시 사우(士友)들 역시 그렇게 한자가 더러 있었다.』 하였다. 생각하건대, 효(孝)와 충(忠)은 한가지여서 효를 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면 그 충을 하면서도 반드시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할 일을 하는 것이니, 두 선생이 세운 탁월한 것은 본래 근본이 있는 것이요, 다만 한스러운 것은 함께 행하였다는 사우의 이름이 실전되어 같이 전하지 않음이다. 그 후에 훌륭한 선비인 김군(金君)이 지은 건 곡 조공의 묘표(墓表)를 읽어보니 그의 충효와 큰 절개를 큰게 칭찬하였고, 당시의 덕망있는 선비들이 이미 선생을 야은과 함께 일컬었으며, 또 두 선생은 같은 시대에 살았었다. 그러니 야은의 전기에서 말한 사우란 어찌 조공이 아니겠는가? 공의 휘는 유(瑜)인데 순창인으로 지극한 행실이 있었다. 처음 어머니 상을 당하여서는 상례를 삼가서 행하였고, 그후 계모의 상에도 역시 그러하였다. 아버지가 죽자 자신이 흙을 져다가 장사하였다. 앞뒤의 상에 모두 三년복을 입고 날마다 묘를 살폈는데 비 바람이 심하게 불어도 그만두지 않았다. 처음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여 벼슬을 시작하였는데, 고려조에서 부정(副正)에 이르자 고려가 망하였다. 조선에 들어와 여러 차례 관직으로 불렀고, 심지어 검교 한성윤(檢校漢城尹)으로 불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이를 세종께서 아름답게 여겨 그의 정려에 「효자 전부정 조 유의 정려」라 표하였는데, 거기에 고려의 관직을 쓴 것은 조선에 신하 노릇하지 않았음을 보여 공의 뜻을 이루게 한 것이다. 아! 공은 쌀밥을 먹고, 비단옷 입는 것을 불안하게 여겨 차라리 한 세상 사람들이 다행한 것을 등지고 그의 양심에 따랐다. 이 마음을 미루어 보면, 주(周)나라 곡식먹는 것 부끄럽게 여기고 또 한 세상이 다 따른 것을 등지고 그 뜻을 행한 것이다. 백이 숙제의 행실도 그 마음이 편한 바를 따른 것에 불과하니, 공이야말로 가위 믿는 도를 홀로 실천한 군자라 하지 않겠는가. 공이 처음에는 순창의 건곡에 살다가 후에 순천 겸천으로 옮겨 졸하였다. 숙종(肅宗)때 호남의 선비들이 공의 덕을 사모하여 사당을 세워 향사(享祀)한다. 옛날에 정려비가 있었는데, 세대가 멀어 비석이 낡아 지탱할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자손들이 새로 세우기를 도모하여 그들 종인(宗人) 몽신(夢臣)을 시켜 서울로 달려와 나에게 비음기(碑陰記)를 부탁하였다.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옛날 공자께서 연릉 계자(延陵季子)의 묘에 비문을 지으면서 단지 여덟 글자 뿐이었다. 공자로부터 지금까지 몇 천년이 되었는데도, 감히 한자도 더 보태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계자(季子)의 어짊은 천하가 다 밝게 알아 해나 별과 같다. 이제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붓을 들어 공의 어진 덕을 기리게 하더라도 어찌 성조(聖朝)에서 명(命)한 것보다 낳겠는가? 이미 그분의 효를 말하였고, 그의 충을 드러냈으니, 「효자 전부정 조유의 정려(孝子前副正趙瑜之閭)란 아홉자가 구정(九鼎)보다 무거운데, 내가 어찌 감히 덧 붙이겠는가?.』 하였다. 그랬더니, 몽신(夢臣)이 말하기를, 『비록 그렇다. 하지만 우리 종인들의 소원입니다』 하였다. 그래서 삼가 유사(遺事)를 상고하여 약간의 말을 써서 돌아가 새기도록 하였다. 공에게는 두 아들이 있는데, 참의(參議) 사문(斯文)과 절도사(節度使) 숭문(崇文)이다 참의의 아들은 지산(智山)인데 그의 집안을 이어 세 동생과 서로 우애가 있어, 강회(江淮) 대금(大衾)의 풍도가 있었다. 절도사는 그의 아들 철산(哲山)과 함께 사육신의 일에 화를 당하였다. 그래서 내가 비석 끝에 함께 쓴 것은 공의 충효가 비단 그 자신에만 그친게 아니라, 또 후손에게도 그렇게 할 것을 가르친 것이다. 내가 여기에 쓴 것은 비단 그의 자손들의 영광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장차 나라의 빛이 되었으면 한다. 의령(宜寧) ㉝남유용(南有容) 지음 註:㉝ 남유용(南有容一六九八〜一七七三):본관은 의령(宜寧) 호는 뇌연(雷淵) 대제학 용익(龍翼)의 증손. 一七二一년 진사가 되고, 강능참봉, 세자익위사 시직을 지내는등 一七五七년 원손사부, 예조참판과 같은 많은 벼슬을 지내고, 一七六七년 우빈객(右賓客)을 끝으로 치사한 후 봉조하(奉朝賀)가 되었다. 구정(九鼎):夏나라 禹王이 九州에서 모은 쇠로 만든 솥인데, 夏, 殷, 周 三國의 國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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